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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히로시마 원폭

배경

연합군의 원자폭탄 투하로 1945년 8월 일본이 무조건 항복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우리민족은 광복을 맞이하였다. 그러나 그 당시 이데올로기 대립의 주역인 열강들에 의해 38선을 기준으로 국토가 분단되면서 남쪽은 미군이, 북쪽은 소련군이 진주하게 되었다.

이어 4차례에 걸친 회담은 우리 민족이 그토록 바라던 즉각적인 통일과 반하는 결과를 가져왔고 우리의 의지와는 달리 신탁통치가 결정되었다. 이로써 우리나라는 남쪽에는 대한민국 정부, 북쪽에는 인민공화국이라는 이름으로 각기 다른 정부를 수립하게 되면서 분단이 고착화되기에 이르렀다.

한반도 신탁통치
남한정부수립
북한정부수립

과정

소련의 도움으로 최신무기를 앞세운 북쪽의 통치자 김일성은 한반도를 공산화 시키려는 의지로 1950년 6월 25일 남침하게 된다. 전쟁이 시작되자 북한군은 3일만에 서울을 점령했으며 한달여만에 낙동강 방어선까지 밀어붙이는 등 신속하게 전세를 장악했다.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 성공으로 서울과 원산, 평양까지 탈환하여 곧 통일을 눈앞에 두게 되었으나 중공군의 개입으로 전세는 다시 역전되어 장기화될 조짐이 나타났다.

38선 경계선
북한군전쟁사열
북한군 남침

38도선을 뺏고 뺏기는 과정에서 미국과 유엔을 시작으로 휴전문제가 언급되었고 1951년 7월, 개성에서 1차 회담이 열리게 되었다. 그러나 개성이 38선 이북에 있다는 점을 이유로 유엔군측은 새로운 회담장소를 원하게 되었고 이에 소련군측은 유엔군측의 제안을 받아들여 1951년 10월, 판문점이 새로운 회담장소로 결정되었다.

이로써 한반도는 민족의 동의 없이 분단된 채, 세계에서 유일무이한 비무장지대가 만들어지게 되었다.

유엔군 인천상륙작전
중공군의 개입
휴전회담 첫날